도산서원의 옥의 티..
안동을 여행지로 정하면서 제일 가 보고 싶은 곳 중에서
제일 우선적인 곳이 바로 도산서원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도산서원이란 어떤 곳인지에 대해 공부도 하고
그곳의 지리적인 위치등을 알고 도산서원을 향하니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도산서원 들어 가는 입구.
안동시에서 도산서원까지 가는 길은 굽이 굽이 산길이었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고 이곳에 도착하니 역시 이곳에서 공부를 하면 왠지
머리에 쑥쑥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많이 드는 곳이었습니다.
맑은 공기와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경이 마음까지 편해지는 듯 했습니다.
도산서원에 들어가는 길의 운치있는 풍경.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
사적 제 170 호.
퇴계 이황 선생은 연산군 7년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여
선조 3년에 돌아 가셨습니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습니다.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이 나라
교육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고 만대의 정신적 사표가 되었습니다.
도산서원 들어가는 입구.
고즈넉한 분위기가 옛날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까지 들더라구요.
도산서원 들어가는 정문에서 본 도산서원 전경.
정말 운치있는 풍경입니다.
그럼 도산서원의 내부를 자세히 구경해 보실까요.
농운정사.
제자들이 공부하던 기숙사입니다.
선생께서 제자들에게 공부에 열중하기를 권장하는 뜻에서
한자의 工 자 모양으로 짓도록 하였습니다.
공부하던 동편 마루를 '시습재' 라 하고, 휴식하던 서편 마루를 ' 관란헌' 이라 하였습니다.
옛 선조들의 지혜가 돋보이는 문과 창.
다른 곳과는 달리 창이 유난히 많은 건 바로 채광을 좋게하여
학업에 더 열중할 수 있도록 한 것이랍니다.
이곳은 공부를 하다 잠시 쉬는 곳인 바로 휴게실같은 곳.
요즘 시대에 말하면 오락실이나 놀이터 같은 곳이랍니다.
옛 선조들은 노는 것조차 자연을 느끼는 것이라는데..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 곳임에는 틀림이 없네요.
서당가는 문.
도산서당의 전경.
어린 아이들이 공부하러 가는 도산서당의 입구.
도산서당.
퇴계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거처 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입니다.
거처하시던 방은 '완락재'라 하고 마루는 '암서헌' 이라 하였습니다.
도산서당에서 특이한 곳 중 하나는 선생께서 거처하던 방입니다.
방 안쪽을 자세히 보면 바닥보다 조금 높게 만들어져 있는 곳이 있는데요.
이것은 바로 책을 소중히 여기는 선생의 뜻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늘 책이 머리위에 놓여 있도록 만든 선생의 마음이지요.
이 모습을 보니 옛날 말에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말이 생각이 나네요.
도산서당옆에 선생께서 좋아 하시던 매화원이 있는데요.
그곳에 선생께서 직접 쓰신 매화원이란 글귀가 있답니다.
옛 선조들은 나무도 소중히 여긴 흔적이 곳곳에 있답니다.
특히 도산서당 입구에 있는 이 향나무는 벽에 위치해 있는데요.
나무에 손상이 되지 않게 벽을 만든 것이 눈에 띕니다.
나름 많은 생각을 해주는 부분입니다.
전교당.
보물 제 210 호
서원의 중십이 되는 건물로 조선 선조 7년 (1574 )에 건립된 대강당입니다.
' 도산서원'의 사액현판이 게시되어 있으며,
스승과 제자가 함께 모여 학문을 강론하던 곳입니다.
한석봉의 친필인 도산서원의 현판.
장판각.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던 장소입니다.
선조어필, 퇴계선생 문집유묵, 언행록, 병서, 도산십이곡 등의 목판
2,790장이 보관되었다가 2003년 5월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되었습니다.
상덕사.
보물 제 211 호
선생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입니다.
퇴계선생의 위패와 제자인 월천 조목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습니다.
매년 춘.추 (음력 2.8월 )로 향사를 지냅니다.
도산서원을 구석 구석 잘 구경하셨나요.
이렇게 도산서원내의 여러곳을 구경하며 그에 맞는 시설에 대해 여러가지 공부와
옛 선조들의 지혜를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도산서원에서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옥의티를 발견하였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긴 했지만..
제가 생각했던 옥의티 주위에는 사람들이 많은 시간을 그 장소에서 대화를 하며
조금은 아쉬운 마음을 표현하였답니다.
저도 도산서원을 들러보며 옥의티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시더라구요.
그것은 바로..
도산서원 정문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나무 한그루입니다.
왜 이 나무가 도산서원의 옥의티라고 말하는지 잠깐 사진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 나무는 1970년에 박정희 전대통령께서 직접 손수 심은 나무입니다.
나무 이름은 금송이라고도 합니다.
그럼 금송이란..
금송은 소나무가 아니며, 松(소나무 송)이라는 이름은 일본에서 잘못 붙인 이름입니다.
일본 특산종이구요.
금송 주변의 매화나무와 모란ㆍ회양목 등은
금송의 그늘에 가려 성장이 어려운 상태이며,
금송 옆의 수령
3백여년 된 토종 회화나무는 2001년 고사(枯死)했다는 것..
경북 안동시에서는 지난 70년 도산서원을 보수해 준공할 때
박정희 전대통령이 기념으로 심은 도산서원 서당 앞에 있는
금송이 일본이 원산지라는 비판에 따라 문화재청의 지침을 받아 2006년도 안에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말이 나온지 몇 년이 흘러도 금송은 도산서원 서당앞에 있습니다.
도산서원의 전경을 가린채...
이 나무가 왜 도산서원의 옥의티일까?..
그것은
도산서원의 멋진 전경을 이 나무로
인해 가려진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나 다 이곳 도산서원에 와서 보시면 느끼실 부분일지도..
도산서원내를 자세히 구경해 보면 주위 나무들이 키가 낮은
매화나무등으로 꾸며진 것을 볼 수 있을겁니다.
옛 선조들은 나무 한그루를 심어도 주위의
풍경을 생각해서 심은 듯한데..
그런데..
도산서원의 멋진 전경을 가려버린 저 금송으로 인해 답답해 보인답니다.
1970년대에 심은 금송은 예전에 나온 1,000원짜리 지폐에도 나옵니다.
그 당시 지폐에 나 올때만해도 그렇게 나무가 크지 않은 듯 한데..
세월이 많이 흐르다 보니
나무도 많이 자라 지금은 도산서원의 전경을
앞에서는 전혀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제가 나름 도산서원의 옥의티라고 생각하고 한참을 보고 있으니,
도산서원을 안내하시는 분께서 금송에 관한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 주시며,
안타까운 부분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여러분도 도산서원에 가시면 자세히 한번 보십시요.
제가 옥의티라고 말하는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를 하실겁니다.
그리고 또다른 옥의티라고 느낀 건 바로...
도산서원 곳곳에 있는 시멘트벽.
1970년대에 도산서원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벽 전체를 시멘트로 발라 너무 인공적인 분위기를 만든 것.
아차 한군데 돌로 만든 벽이 있었네요.
도산서당들어가는 입구옆에 벽..
그나마 돌에 황토색깔로 발라 옛 정취를 나름 느낄 수는 있었네요.
하지만..
대부분의 벽은 시멘트 벽..
오래된 도산서원의 멋진 풍경과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
벽이 꾸며져 있어 안타까웠습니다.
도산서원 정문에서 바라 본 주위의 벽도 마찬가지로 시멘트벽.
사원과 주위의 모든 것들은 옛 모습 나름대로 옛모습을
유지하면서 잘 복원된 것 같은데..
그에 비해 벽은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것에
조금은 안타까운 부분이었습니다.
아름답고 멋진 우리의 문화재를 구경하며 조금만 신경쓰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도산서원의 옥의티를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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